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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제했어?”
“응, 했어.”
그런데 가방을 열어보니 숙제는 그대로였습니다.
“양치했어?”
“했어.”
칫솔은 마른 채 그대로 놓여 있었습니다.
예전의 저는 이런 일이 반복될 때마다 아이가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분명하지 않았는데 너무 자연스럽게 “했어”라고 말하니 화가 날 때도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버릇의 문제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더 정확하게 물어보고, 확인하고, 때로는 야단도 쳤습니다. 하지만 이상한 점이 있었습니다.
아이가 일부러 저를 속이는 것처럼 보이지 않을 때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정말 자기가 했다고 생각하는 듯한 표정을 지을 때도 있었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다른 질문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혹시 이 아이는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기억하고 실행하는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 질문을 따라가면서 알게 된 것이 바로 작업기억(Working Memory) 이었습니다.

작업기억이란 무엇일까요?
작업기억은 단순히 오래 기억하는 능력과는 조금 다릅니다.
쉽게 말하면 지금 필요한 정보를 잠시 머릿속에 붙잡아 두고, 그 정보를 이용해 행동까지 이어가는 능력입니다.
예를 들어 부모가 아이에게 이렇게 말한다고 해보겠습니다.
“방에 가서 양말 가져오고, 가방 챙긴 다음 물병도 가지고 와.”
아이는 이 말을 듣고 세 가지 지시를 잠시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방으로 이동하면서도 무엇을 해야 하는지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
하지만 작업기억에 어려움이 있는 아이는 방으로 가는 도중 다른 장난감이 눈에 들어오거나 다른 생각이 떠오르면 처음 들었던 지시 일부를 놓칠 수 있습니다.
부모 입장에서는 분명 조금 전에 말했기 때문에 답답합니다.
“내가 방금 말했잖아.”
하지만 아이에게는 부모의 말이 제대로 저장되지 않았거나, 행동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일부가 사라졌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이 차이를 이해하고 나니 저는 아이의 행동을 보는 시선부터 달라졌습니다.
“했어”라는 말이 언제나 의도적인 거짓말은 아니었습니다
물론 아이들도 거짓말을 할 수 있습니다.
혼날까 봐 사실과 다른 말을 하기도 하고,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상황을 다르게 설명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성장 과정에서 나타날 수 있는 행동입니다.
따라서 아이가 사실과 다른 말을 했다고 해서 모든 것을 작업기억 탓으로 돌릴 수는 없습니다.
다만 제가 중요하게 생각하게 된 것은 행동의 결과만 보고 곧바로 의도를 단정하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특히 이런 일이 반복된다면 조금 더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 여러 가지를 한꺼번에 부탁하면 중간에 잊어버린다.
- 물건을 자주 어디에 두었는지 잊는다.
- 숙제나 준비물을 알고 있으면서도 챙기지 못한다.
- 방금 들은 지시를 다시 묻는다.
- 어떤 일을 하러 갔다가 다른 행동을 하고 돌아온다.
- “했어”라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시작조차 하지 않은 경우가 반복된다.
이런 모습 하나만으로 특정 질환이나 상태를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집뿐 아니라 학교나 다른 생활환경에서도 비슷한 어려움이 지속된다면 단순한 버릇으로만 생각하기보다는 아이가 기억하고 계획하고 행동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무엇을 어려워하는지 관찰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ADHD와 작업기억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ADHD가 있는 일부 아동과 청소년에게는 주의 조절이나 충동 조절뿐 아니라 작업기억과 실행기능의 어려움이 함께 나타날 수 있습니다.
실행기능이란 해야 할 일을 계획하고, 순서를 정하고, 주의를 유지하고, 행동을 조절하면서 목표까지 이어가는 여러 능력을 말합니다.
그래서 겉으로는 이런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숙제를 해야 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지만 시작하지 못하거나, 준비물을 챙기려고 방에 들어갔다가 다른 일을 하거나, 여러 단계의 지시 가운데 일부만 기억하는 식입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아이가 자주 잊어버린다고 해서 ADHD라고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수면 부족, 스트레스, 불안, 발달 단계, 학습 환경 등 여러 이유로 집중력과 기억력이 일시적으로 떨어질 수도 있습니다.
ADHD 여부 역시 한두 가지 행동만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환경에서 나타나는 행동과 발달 과정 등을 종합하여 전문가가 평가해야 합니다.
저에게 작업기억이라는 개념은 아이에게 진단명을 붙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아이의 행동을 조금 다르게 이해하기 위한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혼내기 전에 제가 바꾼 방법
가장 먼저 바꾼 것은 질문이었습니다.
예전에는 이렇게 물었습니다.
“숙제했어?”
이 질문에는 대답이 두 가지밖에 없습니다.
“했어.” 또는 “안 했어.”
대신 저는 가능한 경우 아이와 함께 현재 상태를 확인하는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숙제 어디까지 했는지 같이 볼까?”
그리고 한꺼번에 여러 가지를 지시하기보다는 해야 할 일을 작게 나누려고 했습니다.
“방 정리하고 숙제하고 가방 챙겨.”
보다는,
“먼저 책상 위에 있는 책부터 정리하자.”
하나를 마치면 그다음 행동으로 넘어가는 식입니다.
말로만 반복하는 것보다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메모나 체크리스트를 사용하는 것도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 숙제
□ 준비물
□ 물병
□ 양치
□ 가방
처럼 아이가 직접 확인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부모가 계속 “했어? 안 했어?”라고 검사하는 역할을 조금 줄이고, 아이가 스스로 확인하는 습관을 연습하는 데도 도움이 됩니다.
진실을 말했을 때 혼내지 않는 것도 중요했습니다
제가 가장 많이 바꾼 부분은 이것이었습니다.
아이가 “사실 안 했어”라고 말했을 때 곧바로 화부터 내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왜 거짓말했어?”
대신,
“말해줘서 고마워. 그럼 지금부터 어떻게 하면 될까?”
라고 말하려고 했습니다.
아이가 사실대로 이야기했는데 그 순간 큰 꾸중을 듣는 경험이 반복되면 다음에는 사실을 말하기가 더 어려워질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실수를 인정하거나 사실대로 말했을 때 문제를 함께 해결하는 경험이 쌓이면 아이도 조금씩 자신의 행동을 돌아볼 기회를 가질 수 있습니다.
물론 이것이 잘못된 행동을 무조건 넘어가 준다는 뜻은 아닙니다.
사실을 말하는 것과 행동에 책임을 지는 것은 함께 가르칠 수 있습니다.
“솔직하게 말해줘서 고마워. 하지만 숙제는 해야 하니까 지금 계획을 세워보자.”
저는 이 방법이 아이를 혼내지 않는 교육이라기보다, 아이가 자기 행동을 스스로 확인하도록 돕는 방법에 더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언제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야 할까요?
아이들이 깜빡하거나 부모의 말을 잊는 것은 흔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런 어려움이 오랫동안 반복되고 일상생활에 영향을 준다면 전문가와 상담해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숙제나 준비물을 지속적으로 챙기지 못해 학교생활에 큰 어려움이 생기거나, 지시를 따라가는 것이 지나치게 어렵거나, 충동적인 행동과 감정조절의 어려움이 함께 반복되는 경우입니다.
또 사실과 다른 이야기가 점점 심해져 가족이나 친구 관계에 실제적인 문제가 생긴다면 단순히 “거짓말 버릇”이라고 결론짓기 전에 그 행동 뒤에 어떤 어려움이 있는지 살펴보는 것이 좋습니다.
필요하다면 소아청소년과, 소아청소년 정신건강의학과 또는 발달 관련 전문가에게 상담을 받아볼 수 있습니다.
평가를 받는 목적은 아이에게 이름표를 붙이는 것이 아닙니다.
현재 아이가 무엇을 어려워하고 있으며 어떤 도움이 필요한지를 알아보기 위해서입니다.
제가 뒤늦게 알게 된 것
저는 한동안 아이가 사실과 다른 말을 하면 그 말부터 바로잡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아이를 지켜보면서 생각이 조금 달라졌습니다.
부모 눈에는 똑같이 “안 했는데 했다고 말하는 행동”으로 보여도 그 이유는 하나가 아닐 수 있었습니다.
혼날까 봐 숨기는 경우도 있고, 정말 잊어버린 경우도 있고, 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을 실제로 했다고 혼동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먼저 묻습니다.
“왜 거짓말했어?”가 아니라 “어디에서부터 일이 꼬였을까?”
그 질문 하나가 아이를 바라보는 제 태도를 많이 바꾸었습니다.
결론
아이가 “했어”라고 말했는데 실제로 하지 않았다면 부모로서는 화가 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같은 행동이 반복된다면 거짓말이라고 단정하기 전에 작업기억, 주의집중, 실행기능 그리고 아이가 처한 상황을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부모가 모든 행동을 대신해 줄 필요는 없습니다.
대신해야 할 일을 작게 나누고, 눈으로 확인할 수 있게 만들고, 사실대로 말했을 때 안전하게 받아주면서 아이가 스스로 확인하고 책임지는 연습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습니다.
저 역시 아이의 행동을 하루아침에 바꾼 것은 아닙니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히 달라졌습니다.
예전에는 아이의 행동을 보며 먼저 “왜 말을 안 듣지?”라고 생각했다면, 지금은 한 번 더 생각합니다.
“이 아이에게 지금 어려운 부분은 무엇일까?”
아이의 행동을 이해한다는 것은 잘못을 모두 허용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아이에게 필요한 방법을 찾은 뒤, 그 방법으로 책임지는 법을 가르치는 것.
제가 경험하면서 알게 된 가장 중요한 차이는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참고 및 글 안내
이 글은 부모의 경험을 바탕으로 작업기억과 실행기능에 관한 일반적인 발달 정보를 함께 정리한 글입니다.
특정 아동의 ADHD 여부를 진단하거나 치료 방법을 제시하기 위한 의료 정보가 아닙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tcHauwNKBwQ
(출처: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출처: 미국 국립정신건강연구소(NIM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