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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일상-경험

약속을 자꾸 미뤘더니 딸이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nzhappyworld 2026. 9. 19. 00:04

목차


    초등학교 3학년 딸과 주말에 공원에 가기로 약속했습니다. 평일에는 잠들기 전에 책을 함께 읽기로 했습니다. 약속할 때는 저도 정말 그렇게 할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일이 바빠지면 가장 먼저 미뤄지는 것이 딸과의 시간이었습니다.

    “오늘은 아빠가 늦어서 안 되겠다. 다음에 하자.”

    처음에 딸은 괜찮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비슷한 일이 몇 번 반복되자 공원에 언제 가는지 묻지 않았습니다. 제가 먼저 주말 이야기를 꺼내도 짧게 대답하고 자기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딸이 바쁜 아빠를 이해해준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 들은 말은 달랐습니다.

     

    “어차피 또 못 가잖아”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토요일 아침, 딸에게 다음 날 공원에 가자고 했습니다. 예전 같으면 몇 시에 출발하는지, 무엇을 가져가는지부터 물었을 아이였습니다. 그날은 저를 보지도 않고 대답했습니다.

    “안 가도 돼.”

    “왜? 너 공원 좋아하잖아.”

    “어차피 또 못 가잖아.”

    저는 순간 서운했습니다. 시간을 내보려고 하는데 딸이 너무 차갑게 반응한다고 느꼈습니다. 그러나 지난 주말들을 떠올려보니 아이에게 따질 수 없었습니다. 가기로 했던 날 아침에 취소한 적도 있었고, 출발할 시간을 정하지 않은 채 기다리게 한 적도 있었습니다.

    딸은 책 읽는 약속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책 가져오라고 해서 가져왔는데 아빠가 전화했잖아. 기다리다가 나 혼자 읽었어.”

    저에게는 급한 전화 한 통이었지만 아이에게는 책을 들고 기다린 저녁이었습니다. 저는 취소한 약속을 금방 잊었고, 딸은 기다렸던 일을 기억했습니다. 두 사람이 같은 시간을 전혀 다르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바빴다는 설명보다 사과를 먼저 했습니다

    그동안 저는 약속을 지키지 못하면 일이 얼마나 많았는지 설명했습니다. 피곤하고 어쩔 수 없었다는 말도 덧붙였습니다.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아이가 기다린 마음에 대해서는 거의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날 저녁에는 변명부터 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아빠가 공원에 간다고 해놓고 여러 번 못 갔지. 책도 같이 읽자고 하고 너 혼자 기다리게 했고.”

    딸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미안해. 못 지킬 것 같으면 미리 말했어야 했는데, 네가 기다리고 있다는 걸 제대로 생각하지 않았어.”

    “그러면 처음부터 간다고 하지 마.”

    아이의 말이 아팠습니다. 하지만 곧바로 다시는 안 그러겠다고 큰소리치지는 않았습니다. 그 말도 지키지 못하면 사과까지 가볍게 들릴 것 같았습니다.

    대신 딸에게 무엇이 가장 속상했는지 물었습니다. 아이는 공원에 못 간 것보다 계속 기다리다가 마지막에 안 된다는 말을 듣는 것이 싫다고 했습니다. 저는 취소한 나들이만 생각했는데, 딸은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지 모르는 시간이 힘들었던 것입니다.

    하루 열 분을 실제로 지킬 수 있는 시간에 잡았습니다

    딸과 매일 긴 시간을 보내겠다는 약속은 하지 않았습니다. 먼저 제 하루를 살펴보고, 집에 있는 저녁에는 잠들기 전 열 분 동안 함께 이야기하기로 했습니다. 책을 읽어도 되고 학교 이야기를 해도 됐습니다.

    “열 분 동안은 전화 안 봐?”

    “응. 전화는 다른 방에 놓고 올게.”

    딸은 처음 며칠 동안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옆에 앉으면 책을 넘기다가 짧게 대답했습니다. 예전처럼 바로 웃고 이야기해주기를 기대했다면 저는 또 조급해졌을 것입니다.

    저는 딸이 말을 많이 하는지보다 제가 정한 시간에 자리에 앉는지를 먼저 신경 썼습니다. 책을 읽다가 아이가 다른 이야기를 꺼내면 끝까지 읽어야 한다며 막지 않았습니다. 그 시간의 목적은 책 한 권을 마치는 것이 아니라 딸과 함께 있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날 딸이 학교에서 만든 종이접기를 가져왔습니다.

    “이거 펼치면 다른 모양이 돼. 아빠 해봐.”

    저는 아이가 알려주는 순서대로 종이를 접었습니다. 잘되지 않자 딸이 웃으며 제 손을 잡아줬습니다. 특별한 나들이도 선물도 없었지만, 오랜만에 아이가 먼저 제게 무언가를 보여줬다는 것이 반가웠습니다.

    못 지킬 때는 아이가 기다리기 전에 말했습니다

    늦게 돌아오는 날까지 매일 같은 시간에 함께할 수는 없었습니다. 예전에는 일단 약속하고 어떻게든 되겠지 생각했습니다. 이제는 일정이 바뀌면 딸이 책을 들고 기다리기 전에 알려주려고 했습니다.

    “오늘은 일이 늦게 끝나서 잠들기 전에 못 만날 것 같아. 미안해.”

    “그러면 내일 읽어?”

    곧바로 그렇다고 대답하기 전에 다음 날 일정을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가능한 시간을 정했습니다.

    “내일 저녁 먹고 일곱 시 반에 읽자. 네가 고른 책부터 보자.”

    아이에게 변경된 시간을 말하는 것만으로 끝내지 않았습니다. 제가 잊지 않도록 휴대전화 일정에 적어뒀습니다. 딸과의 시간을 남는 시간에 하는 일이 아니라, 다른 일정처럼 기억해야 하는 일로 다루기 시작했습니다.

    공원에 갈 때도 주말 중 언젠가 가자는 말을 줄였습니다. 갈 수 있는 날에 출발 시간을 정하고 전날 준비물을 함께 챙겼습니다. 날씨가 좋지 않으면 어떻게 할지도 이야기했습니다.

    “비가 오면 공원 대신 집에서 보드게임 할까?”

    딸은 자기가 고른 게임을 꺼내두었습니다. 계획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미리 알고, 바뀐 계획에도 자기 의견이 들어가니 기다리는 모습이 전과 조금 달랐습니다.

    딸이 다시 책을 들고 거실로 나왔습니다

    몇 주가 지난 뒤 딸이 저녁을 먹고 책을 가져왔습니다.

    “아빠, 오늘은 여기부터 읽자. 어제 재미있는 데서 끝났어.”

    처음 책을 읽기로 약속했을 때보다 그 말이 더 반가웠습니다. 한동안은 제가 함께하자고 해도 기대하지 않던 아이였습니다. 이제는 어제 함께한 시간을 기억하고 다음 이야기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좋은 아빠가 됐다거나 딸의 서운함이 모두 사라졌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바쁜 날도 있고 피곤해서 집중하지 못하는 날도 있습니다. 다만 아이가 실망한 표정을 지으면 모른 척 넘어가지 않고, 무엇을 약속했는지 다시 돌아봅니다.

    이번 일을 통해 약속은 말하는 순간보다 지키는 순간에 의미가 생긴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저는 공원에 데려가겠다는 말로 딸을 기쁘게 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딸에게 남은 것은 그 말이 아니라 공원에 가지 못했던 주말과 혼자 책을 읽던 저녁이었습니다.

    지금은 아이가 좋아할 만한 큰 계획을 먼저 꺼내기보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분명하게 말합니다. 열 분을 함께하기로 했다면 그 시간에는 휴대전화를 내려놓습니다. 못 지키게 되면 이유를 알리고 사과합니다. 새로 정한 시간은 다시 미뤄지지 않도록 챙깁니다.

    딸과 가까워진 계기는 멋진 나들이 한 번이 아니었습니다. 같은 자리에서 며칠씩 책을 읽고, 아이의 말을 듣고, 약속한 시간에 나타났던 평범한 저녁들이었습니다. 그 시간이 쌓이자 딸도 조금씩 저를 기다리기 시작했습니다.

    요즘 딸은 제가 거실로 나오면 책 옆자리를 가리킵니다.

    “아빠 자리는 여기야.”

    그 자리에 앉을 때마다 제가 지켜야 할 것은 단순한 독서 시간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딸이 비워둔 자리에 약속한 사람이 오는 것, 이제는 그 일을 가볍게 여기지 않으려고 합니다.